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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물

발해 초기의 설계자, 대야발의 업적과 역사적 의의

by 뷰기자인 2025. 5. 2.

발해(渤海)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건국한 나라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며 200년 이상 존속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다.
이러한 발해의 기초를 세운 인물 중,
대조영의 동생이자 건국의 실질적 동력이었던 인물이 바로 대야발(大野勃)이다.

대야발은 초기 발해 통치 체계를 마련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일 발해 귀족 정치의 뿌리가 되는 대야발계 가문(야발계)의 시조로서
발해 정치사의 큰 줄기를 형성한 인물이다.


1. 대야발은 누구인가?

  • 이름: 대야발(大野勃)
  • 활동 시기: 7세기 후반 ~ 8세기 초
  • 출신: 고구려 유민, 대조영의 동생(혹은 친척으로 추정)
  • 역할: 발해 건국 공신, 귀족정치 체계의 기반 마련
  • 후손: 발해 국왕 중 다수가 대야발의 후손 (‘야발계’라 불림)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료에서는
대야발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많지 않지만,
발해 왕실 가계의 흐름과 왕권 계승 과정에서 그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2. 발해 건국에서의 역할

698년, 대조영은 당나라와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동모산(東牟山)에 발해국(진국)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대조영과 함께 군사와 민심을 결집시킨 중추적 인물이 바로 대야발이었다.

대야발의 공헌

  • 군사력 강화: 대조영과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군을 통합
  • 내부 행정 정비: 초기 발해의 정치 체계를 마련하는 데 조력
  • 왕권 정당화: 고구려 왕실 후계자로서 대조영의 정통성을 뒷받침

대야발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닌,
공동 창업자적 위치에서 국가 설계에 기여한 리더였다.


3. 야발계의 형성과 정치적 기반 구축

대야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그의 후손들이 발해에서 왕위에 오르며 강력한 정치 세력(야발계)**을 형성한 것이다.

계보주요 왕활동 시기
대야발계 대흠무, 대연의, 대인선 등 8세기~9세기 중후반
 

이는 고구려의 전통과 말갈 세력의 연합이라는 복합적 민족 국가였던 발해가
왕권 세습과 귀족 연대를 통해 장기 안정적 통치를 이뤄냈다는 증거다.

야발계의 부상은

  • 대야발의 정치력
  • 귀족 세력과의 유대
  • 국왕 대조영의 신뢰
    이 모두가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4. 대야발의 리더십: 통합과 실용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과 동시에
말갈족의 참여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대야발은 이 같은 복잡한 민족 구성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도록
통합형 실용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주요 특징

  • 포용력 있는 정치: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말갈 족장들과의 연합 유지
  • 실용적 행정: 고구려의 제도와 말갈 풍습을 혼합해 새로운 발해 체제 수립
  • 중앙집권 기반 마련: 지방 부족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왕실 중심 권력 체계 구축

이러한 조치는 발해가 단순히 고구려의 유민 정부가 아닌,
신흥 제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5. 군사 전략과 방어 체계 구축

발해 초기, 대야발은 군사적 전략가로서도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 천문령 전투 이후 잔존 당군의 위협 방어
  • 말갈 내부의 반란 진압
  • 북방 유목민과의 국경 수비 체계 마련

대야발은 발해가 초기 안정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고,
후대 발해가 당·신라 등과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군사 기반을 제공했다.


6. 대야발계 왕조의 확장

대야발의 후손들은 발해 중·후기에 걸쳐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치, 외교, 문화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대표 인물

  • 대흠무(大欽茂): 발해 제3대 왕, 국력 증강과 문물제도 확립
  • 대인선(大仁宣): 발해 마지막 왕, 야발계 출신으로 끝까지 국가 수호
  • 대연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왕족, 대야발 후손 추정

이로써 대야발은 단순히 초기 정치인에 머무르지 않고
발해 왕권 계승의 핵심 혈통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7. 사료에서 보는 대야발의 평가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과 발해 건국을 기록하면서
대야발에 대해 명확한 이름은 자주 언급하지 않지만,
후대 야발계 왕들의 존재를 통해 그의 위상과 업적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에서도 대야발은 다음과 같이 평가된다:

평가 항목내용
정치 발해 초기 정권 핵심 인물, 귀족 통치 기반 마련
군사 말갈과 당의 위협 방어, 국경 수비 공헌
계승 다수 왕의 조상으로 발해 중기 왕조 정통성 확보
역사적 상징 고구려 정신의 계승자, 민족 통합 지도자
 

8. 대야발의 현대적 재조명

오늘날 대야발은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1. 역사 콘텐츠의 인물로 부상

  • 드라마, 다큐멘터리에서 발해 창업 인물군으로 재조명
  • 대조영에 가려졌던 인물이나, 점점 존재감이 부각됨

2. 리더십 모델로서의 가치

  •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
  • 민족과 문화를 연결한 화합형 정치가
  • 실리와 이상을 함께 추구한 현실주의자

3. 지역 문화 자원 활용

  • 대야발의 활동 무대로 추정되는 함경도·만주 지역을
    발해 역사문화 탐방지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인물

 

9. 대야발계의 정치적 영향력과 귀족 체계의 정착

발해는 단일 혈통에 의한 왕권 중심 국가라기보다는,
왕족 중심의 귀족 합의 정치 체제에 가까웠다.
이 구조에서 대야발계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야발계의 귀족정치 확산

  • 대야발의 후손들은 중앙 고위 관직을 다수 차지했고,
    정치·외교·군사 부문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 이는 단순한 왕위 계승 혈통의 유지가 아니라,
    지배 귀족층으로서의 정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특히 발해 3대 왕 대흠무의 통치 아래에서는

  • 율령 반포, 3성 6부제 확립
  •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정상화
    등 발해 역사상 가장 안정된 체제가 수립되었는데,
    이 시기의 중심 인물이 바로 대야발계 출신들이었다.

10. 외교 전략에서 드러난 대야발계의 입지

대야발계 후손들이 주도한 발해 중기는
당나라, 일본, 신라와의 관계에서 상호 균형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시기로 평가된다.

국가외교 정책
당나라 사신 파견을 통한 우호적 관계 유지, 견제할 때는 군사 대응
일본 문물 교류 및 선진 기술 수용
신라 때로는 우호, 때로는 갈등… 국경 방어 강화
 

이러한 대외 정책은 대야발이 구축한 안정된 내부 정치와 군사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즉, 그는 단지 발해를 만든 인물일 뿐만 아니라,
강대국 속에서 생존하고 존립하는 외교 전략의 근간을 닦은 인물로도 볼 수 있다.


11. 고구려 정통 계승자로서의 상징성

대야발의 존재는 단순히 발해 왕족의 조상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고구려 정통성의 실질적 계승자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야발과 고구려 정신

  • 고구려의 ‘호전적 기상’, ‘민족 통합’, ‘강력한 중앙 권력’ 등의 전통이
    발해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야발계의 정치문화가 있었다.
  • 특히 발해는 국호를 ‘진(震)’에서 ‘발해(渤海)’로 바꾸면서
    고구려 왕조 계승을 선언했고, 이때 대야발의 존재는
    혈통적·문화적 정당성의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이로써 대야발은 발해를 단순한 망국 유민의 임시 정부가 아닌,
고구려 후계 국가로 확고히 정립한 인물로 기억된다.


12. 대야발이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시사점

오늘날 대야발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지닌다.

▶ 다문화 융합의 선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융합은 단순한 병합이 아닌 문화적 융합이었다.
대야발은 그 중심에서 포용적 행정을 펼치며,
민족 간 갈등 없이 국가를 통합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 외교 균형 전략의 모범

중국·일본·신라와의 외교에서 치우치지 않고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외교 전략을 취한 점은
오늘날에도 동북아 관계 속 전략적 균형 모델로 참고할 수 있다.

▶ 리더십의 본질

  • 출신 배경보다 실력과 충성을 기반으로 국가 설계를 이끈 점
  • 왕이 아닌 조력자로서, 국가의 성장 기반을 다진 점

이는 현대 조직 사회에서도 이상적인 조력형 리더십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