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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외교장인 서희에 대해 알아보자

by 뷰기자인 2025. 4. 22.

고려 외교의 신화, 서희의 위업
고려의 역사에서 "말 한마디로 전쟁을 멈추고 영토를 넓힌"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서희(徐熙)일 것입니다. 그는 고려 역사상 무력 충돌 없이 영토를 확장한 유일한 외교관이었으며, 말의 힘과 지혜, 외교 전략의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희가 거둔 성과는 단순한 외교 성과가 아니라, 고려의 국운을 지키고 도약시킨 국가적 전환점이자, 한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전설입니다.



1. 서희의 출신과 경력


서희는 942년(태조 25년) 고려 태조의 치세에 경상도 관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언변에 능했고, 특히 토론과 설득력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냉정하고 침착하며,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과 논리력을 갖춘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도 그의 탁월한 판단력과 외교적 소통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 서희는 외교 사절과 중책을 맡는 핵심 문신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2. 거란과 고려의 긴장: 제1차 거란 침입

 


서희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계기는 993년 제1차 거란 침입입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의 국교 수립을 계기로 북방 강국인 거란(요나라)의 의심과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거란은 무려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남쪽까지 진격했습니다.

당시 조정은 군사적 대응을 준비하면서도, 전면전을 피하고자 외교적 해법을 우선으로 시도하였고, 이 중요한 담판의 임무를 맡은 인물이 바로 서희였습니다. 그가 나서기 전까지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3. 전쟁 대신 외교로, 6주를 획득한 담판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대면해 일대 일 외교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 협상은 단순한 외교 교섭이 아니라, 군사적 위기 속에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담판이었습니다.

서희는 논리와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협상에 나섰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므로, 고구려 영토였던 서북 방면은 원래 고려의 땅이다.

고려는 독립 국가로서, 송과의 국교는 거란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한 셈이니, 철수해야 한다.

서희는 무력을 꺼내지 않고도 상대에게 당위성과 정당성을 설득했습니다. 굴복시키는 협상이 아닌, 이해시키는 전략적 외교를 펼쳤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거란은 철수에 합의했을 뿐 아니라, 압록강 이북의 6개 주(今 자성·화주·공험진 일대)를 고려에 넘기는 전례 없는 외교적 승리를 허락합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받았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4. 서희 외교의 핵심 전략 분석

 

 

서희의 외교는 단순한 언변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는 치밀한 전략과 구조화된 설득을 통해, 아래와 같은 복합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역사적 정통성 강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강조하여 당위성과 명분을 확보.

상대의 입장 공감: 거란의 송 견제를 이해하며, 고려의 중립성을 어필.

군사 억제력 유지: 외교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방어 태세를 유지, 협상에 무게감 부여.

실리와 명분 동시 확보: 영토 획득을 정당화하고, 고려가 피해자임을 부각.

이 전략은 단순히 ‘말을 잘해서’ 성공한 외교가 아니라, 역사 인식 + 외교 심리전 + 국방력까지 융합된 전술적 협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습니다.

 

5. 고려에 끼친 실제 영향과 변화

 


서희의 외교는 고려의 정치·군사·사회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압록강까지의 영토 확장으로 북방 국경이 안정됨

거란과의 대규모 충돌을 최소화하여 내정 안정 확보

북방 개척과 지역 개발 기반 마련

국제적으로 고려의 고구려 정통성 인정 유도

이후 20년간 대규모 전쟁 없이 문화적 황금기 형성

즉, 이 한 번의 담판은 고려의 장기적 안보, 문화 번영, 대외 관계의 기틀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6. 서희의 품격과 인물됨

 


서희는 협상 후에도 자만하지 않았고, 겸손한 태도로 조정의 신뢰를 더했습니다. 그의 품행과 판단력은 외교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보여주었고, 실제로 그는 이후에도 계속 외교·내정 분야에서 중책을 맡아 고려 조정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부를 탐하지 않았고, 권력에도 연연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안정을 중심으로 판단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7. 후대 외교의 본보기로 계승

 

 


서희의 외교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이후 수백 년 동안 외교·리더십 교육의 모범 사례로 활용됩니다. 조선시대에도 서희의 외교는 사대외교의 이상형으로 인용되었고, 조선의 실리외교 노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일본, 명나라, 청나라 등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정세 파악, 역사 논리 활용, 군사적 준비와 병행한 외교 협상술 등에서 서희의 전략이 반복적으로 재조명됩니다.

 

8. 오늘날 서희가 주는 메시지

 


서희의 외교에서 우리는 단순히 말솜씨가 아닌, 준비된 리더의 설득력과 명분이 있는 협상이 주는 강력한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도 국제 관계와 외교에서 그의 전략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합니다:

전쟁 없는 외교는 말보다 군사력이 아니라 전략의 문제다

실리는 명분에서 나오고, 명분은 역사와 논리에서 비롯된다

협상은 상대를 꺾는 것이 아니라, 공감시키는 것이다

말의 힘은 칼보다 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희는 단지 고려의 외교관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외교 철학자이자 리더십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서희 외교 이후 고려의 국방 전략 변화

 


서희의 외교는 거란과의 전면전을 막았지만, 고려는 이후에도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6주를 획득한 이후 새로 확장된 북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 요충지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압록강 인근에는 성곽과 군사시설이 신속히 건설되었고, 군사 배치를 조정하여 국경 방어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서희의 외교가 단순히 일시적 평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국방 체계 정비를 유도한 장기적 성과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고려는 북방의 여러 부족, 예를 들어 여진족 등과도 실리 중심의 외교 전략을 병행하며 국경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서희의 외교가 일종의 모델이 되어, 무력보다는 외교적 소통을 통해 국익을 지키는 전통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10. 조선 시대 사서에서 본 서희의 위상

 


서희는 고려 시기뿐 아니라, 조선왕조에서도 매우 높게 평가된 인물입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서희에 대한 언급은 간헐적으로 등장하며, 이는 조선이 추구한 외교 노선과 그가 남긴 유산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실용적인 외교정책(사대교린 정책)을 정립할 때 서희의 외교적 성공 사례가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종 대의 학자들은 서희를 '설득과 신의로 나라를 지킨 사람' 이라고 평가하며, 무력보다 명분과 언어의 힘을 중시하는 유교적 외교의 이상형으로 보았습니다.

정도전과 같은 정치 이론가 역시 “서희야말로 외교란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자”라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외교 성과를 넘어, 국가 철학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서 가치가 높다는 방증입니다.

 



11. 문화·교육 분야에 남긴 유산

 

서희의 외교적 위업은 단지 역사 기록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후대에 문학, 교육, 도덕 교육의 주요 사례로 재해석되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서당과 향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서희의 일화를 가르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말로 나라를 지킨 장수'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청렴, 지혜, 용기를 상징하는 대표 이야기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서희를 주인공으로 한 설화, 판소리, 민화 등이 등장하며, 그는 군사 장군이나 장수로서보다는 지혜로운 협상가이자 국민적 영웅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는 서희의 외교가 소개되고 있으며, 많은 리더십 강의나 스피치 수업에서 서희 담판의 전략적 화법이 사례로 인용됩니다.

 


12. 서희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이유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외교 분쟁과 국제 협상 속에서 서희의 전략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무력을 앞세우지 않았고, 상대를 모욕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주장에만 매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국가와 백성을 위한 현실적 해법을 고안한 협상가였으며, 절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리더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서희는 단지 과거 고려의 인물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공 리더의 이상형으로 지금도 유효합니다.
‘전쟁을 막고 땅을 넓힌 협상가’라는 수식어는 그저 상징이 아니라, 현대 외교와 정치, 그리고 기업 경영까지 통하는 핵심 원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