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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알아라 최영 장군에 대해 알아보자

뷰기자인 2025. 4. 21. 20:31

고려 말기 마지막 충신, 최호 장군의 위업과 평생
고려 후기, 나라의 명맥이 흔들리고 외적과 내부 반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 충직한 무장 한 사람이 조용히 무너져가던 왕조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화려한 권력보다 충성을 택했고, 야망보다는 의리를 지켰다.
그의 이름은 최호(崔鎬). 고려를 위해 칼을 들고, 그 끝은 자신에게 향했던 비극적인 충신의 삶이었다.

 

1. 고려 말기의 혼란, 최호가 등장한 배경


14세기 후반의 고려는 여러 가지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적으로는 왜구의 해안 침입, 홍건적의 침공, 그리고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이 계속됐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전횡, 왕권 약화, 민심 이반 등으로 왕조는 깊은 내홍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한 명의 청렴한 무장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귀족·무신과 달리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바로 최호 장군이다.



2. 강릉에서 태어난 무인의 기질

 


최호는 131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 무관직을 지낸 무장 가문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에 뛰어났고, 병법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중앙군과 국경 지역에서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았으며, 점차 고려 군부 내에서 중용되기 시작했다.

그의 성품은 검소하고 청렴했으며, 특히 권세나 금전에 욕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부하에게는 공정하고 백성에게는 너그러웠으며, 이를 두고 후대는 “장수이되 스승 같고, 군인이되 벗 같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3. 왜구 격퇴: 고려 연안의 평화를 되찾다

 


고려 말, 왜구는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수시로 침입해 방화, 약탈,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그 피해는 백성들의 삶 자체를 위협했고, 조정은 이들에 맞서기 위해 여러 장수를 파견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6년, 최호는 금강 하구 일대에서 벌어진 왜구 토벌 작전을 지휘한다. 그는 기존의 정면돌파 방식이 아닌, 후방 차단, 보급로 차단, 기습 공격 등 창의적인 전술을 통해 단시간 내에 왜구를 궤멸시킨다.
이 전투는 이후 고려 수군이 자존심을 회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최호는 백성들로부터 ‘왜구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장군’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전투에만 그치지 않고, 남해안 일대의 해안 방어 체계 정비, 수군 훈련 강화, 보급로 재정비 등 장기적인 대비책까지 마련해, 고려 연안 지역의 안보를 안정시킨다.

 


4. 홍건적 격퇴: 개성 수복과 국가 체제 유지

 


1370년대 후반, 중국 원나라가 무너지면서 떠오른 반란군 세력인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에 침입한다.
제2차 홍건적 침입(1361년) 당시 수도 개성이 함락되고, 왕족은 나주까지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최호와 이성계는 함께 전열을 재정비해 개성 수복 작전에 나서며, 결국 홍건적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수도를 되찾은 이 전투는 단지 군사적 승리를 넘어서, 고려 왕조의 붕괴를 막고 정통성을 지킨 역사적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이 승리를 통해 그는 조정에서 정치적으로도 더욱 중용되었고, 이후 국방과 내정을 동시에 책임지는 최고 무장 겸 참모 역할을 맡게 된다.

 

5. 공민왕 개혁의 군사적 후견인


공민왕은 원 간섭기에 굴복했던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토지 제도 개편, 권문세족 숙청, 불교계 개혁 등을 시도한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으며, 개혁정책을 실현하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최호는 공민왕의 의지를 이해하고 군사적 안정 기반 마련, 반란 진압, 지방 통제 강화 등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한 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그는 충직한 군인으로서가 아닌, 정치의 흐름을 꿰뚫는 전략가이자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6. 북방 방어와 외교 전략

 


고려 말, 북방은 여진족과 말갈족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고,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날카로웠다.
최호는 단순한 방어에 그치지 않고, 성곽 재건, 방어 기지 정비, 국경 민심 안정화 정책 등을 통해 북방 방어체계를 완성시킨다.

또한 그는 외교적으로도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주 외교 노선을 주장하며 고려의 외교 자주권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정책은 훗날 요동 정벌 시도로 이어지게 된다.

 

 


7.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1388년, 고려는 명나라와의 관계 악화 속에서 요동 정벌을 추진한다.
최호는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국위를 세우기 위해 이성계를 정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지만, 이성계는 정치적 판단 끝에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이 회군은 사실상 무력 쿠데타였고, 고려 왕조의 마지막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
최호는 끝까지 왕명과 국가 질서를 지키려 한 충신이었으며, 회군을 반대한 결과로 정치적 실각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8. 유배와 사사, 최후까지 지킨 충절

 

 


회군 이후 이성계 정권은 최호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그를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신이 옳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해 말 사사(死赦) 당한다.

죽는 날까지 왕의 명을 어긴 적 없었던 최호의 최후는,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충신의 표본으로 기록되며, 후대에 “최호는 무너지는 조정을 끝까지 받쳐든 기둥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9. 후대의 재조명과 현대적 가치

 


조선 건국 이후 최호는 초기에는 불편한 인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충신의 대명사로 재조명된다.
그는 백성을 먼저 생각한 무장, 권력보다는 명분을 택한 군인, 끝까지 왕에게 충직했던 신하로 평가받으며 사당과 비가 세워지고, 교육자료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소개된다.

특히 현대에는 공직자 윤리 교육, 군 리더십, 민본주의 관점에서 최호의 생애가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 “충은 사라져도 기억된다”는 말을 입증한 인물로 평가된다.

 

 

10. 백성을 위한 민본적 통치철학 실천 (보완 확장판)

 


최호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단순히 국가 체제나 왕실만을 위한 충신이 아니라, 백성을 아끼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던 ‘민본적 무장’의 면모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전투 이후 항상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농경지 복구, 유랑민 구제, 세금 감면 등의 실무에도 적극 개입했습니다.

예를 들어, 금강 하구 전투 이후 피폐해진 연안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 보급을 지시하고, 피란민 보호소 설치를 명령했으며, 자신이 받았던 전리품 일부를 직접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략가가 아닌, 백성의 고통에 공감하는 행정가이자 따뜻한 리더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을 군사적으로만 지지한 것이 아니라, 토지 반환과 농민 자율권 확대 같은 민생 개혁에도 적극 협력했습니다. 심지어 전투 중에도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명령을 반복했으며, 포로 처우 개선, 민간 약탈 금지, 병사들의 군율 강화 등 전장에서조차 백성을 위한 원칙을 지켰던 리더였습니다.

최호는 전쟁터에서는 냉철했지만, 백성을 대할 땐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무력으로만 지배하던 다른 무신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고, 이는 그가 단순한 장군이 아닌, 지도자로서 기억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